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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unctum_여행/200911_오대산

오대산 여행 02. (2009.10.31 - 11.1)


아침이 밝았다. 밤새 방안이 찜질방 마냥 너무 더워서 창문 열어 놓고 잤다. 자고 나면 비가 그쳐 있기를 내심 바랬는데 역시나 비가 주륵주륵 내리고 있었다. 8시 반쯤 펜션에서 주는 아침 챙겨 먹고는 우산 쓰고 주변 산책을 나섰다.




빨간색 벽돌 위로 주황색 코지하우스 간판




펜션 한 쪽 끝에는 마이대니의 캐러반처럼 Cabin이 따로 마련되어 있었다. 프로포즈룸의 연장 공간이라는데 벽난로도 있고, 피아노도 있고, 책도 있고 창 밖으로 산과 강도 보이고, 나름 운치 있었지만 문제는 관리가 안 되 보였다는 것. 온전히 프로포즈 커플들만을 위한 공간인건가. 지난 밤 프로포즈의 흔적인지 빈 와인 병, 잔, 먹다 남은 까나페가 그대로 테이블 위에 남아 있었고, 차를 끓여먹을 물과 커피포트도 보이지 않았다. 마이대니에서는 바다 보면서 홍차 한 잔도 하고 좋았는데. 코지하우스 곳곳이 좀 그랬다. 노벰버나 마이대니에 비해 규모가 작은 것 말고도 아쉬움 점이 많았다.



Cabin 바깥 한 켠에 마련된 소파에 앉아 둘이서 아작아작 콘칩 뜯어 먹으면서 경치 감상 중. 좀 춥긴 했지만 그래도 좋았다.




방으로 돌아와 체크 아웃 전까지 티비보면서 한참 쉬었다. 충분히 쉬다가 느즈막히 체크아웃 할 예정이었다.




체크아웃 직전 노메이크업에 안경 쓰고, 머리 하늘로 뻗쳐 부시시하고 시커먼 모습으로 기념 사진도 한 방 찍고.


12시 가까이 되어 코지하우스에 안녕 하고 오대산 방향으로 향했다. 비가 와서 예정했던 오대산 소금강 트레킹은 포기하고 월정사 전나무 숲을 걸어볼 작정이었다. 바로 옆 자생식물원도 들려보고. 그러다 가는 도중에 소금강 이정표를 발견하고는 일단 입구까지만 가보자 얘기가 나왔다. 막상 가보니 주차장에 관광버스가 줄을 서 있고, 우비 입고 돌아다니는 사람이 꽤나 많았다. 비도 별로 안 오는데 한 번 해볼까. 그럴까. 그냥 가기는 좀 아쉽다 그치. 이차 저차 해서 근처 상점에 물어보니 정상까지 안 갈거면 두 세 시간이면 충분하고 길도 별로 험하지 않아서 이 정도 비에는 괜찮다고 말해준다. 그래서 서둘러 차 안에서 낑낑대며 등산복으로 갈아 입고, 노란 우비 분홍 우비 하나씩 사입고는 소금강 트레킹 길에 올랐다.



그러고보니 결혼 후 처음 함께 하는 트레킹. 빗속에 우비 입고 산 속을 걸어보기는 처음이라 색 다르기도 했고, 상쾌한 산공기에 절로 기분이 좋아졌다. 계곡 양쪽을 오고 가면서 감상하게 만들어진 트레킹 코스가 크게 부담스럽지도 힘들지도 않았다. 이렇게 가끔 가볍게 트레킹하는 것도 좋겠다며 둘이 부산을 떨었다.




노랑 우비 소년(?) 찰칵. 기본 방습도 안 되는 무거운 5D는 차에 두고 아쉽지만 300만화소 폰카로 대신했다.




분홍 우비도 스마일 :-) 혹시 해서 챙겨간 야구모자는 부슬비를 막는 데 정말 유용하게 썼다.




어제 오늘 종일 비가 내려서인지 계곡이 불어 있었다.





보통 이런 풍경. 콸콸 쏟아지는 계곡 물과 그 위로 옆은 안개구름, 알록 달록 색깔옷 입은 나무들. 정말이지 예뻤다. 비가 오지 않았다면 볼 수 없었을 풍경. 왜 작은 금강산이라고 하는지 알만 했다(금강산은 가보지도 않았으면서 -_-). 사실 이번 여행은 얼마 전 신문 주말매거진 코너에서 가을단풍여행으로 소금강 트레킹을 추천한 글을 읽고 난 후에 결정하게 된 거였다. 바로 우리가 원하던 그런 곳이었다.

" 고심 끝에 올해는 강원도 정선의 소금강을 먼저 골랐다. 예년만큼 험한 길도 아니고, 통행에 제한을 두는 구간도 아니다. 대신 여기는 비경이다. 큰 길에서 벗어나 있어, 그리고 아직 사람의 때를 덜 타 비경이다. 개발의 속도가 빨라질수록 비경은 급격히 감소한다. 소금강 일대는 이제 정말 몇 안 남은, 숨어 있는 경치다. 소금강 트레킹은 절벽 위를 걷는다. 소금강 줄기를 내려다보며 걷는 재미가 아찔하다. 정상 공격 산행이 아니어서, 발 아래로 가슴 내려앉는 벼랑이 내려다보여서, 벼랑 끝에 돌단풍이 애처로이 매달려 있어서 올가을 week&이 선보이는 단풍은 새롭고 또 흥미롭다."
([week&커버스토리] 가을아, 웬 걸음이 그리 빠르니 中)

어쩐지 입구에서부터 올라가면서 내내 이상했다. 글에서 소개한 계곡 이름들도 전혀 보이지 않고, 절벽 위를 걷는 코스도 절대 아니었다. 풍경도 사진에서 보던거랑은 너무 달랐다. 그저 코스가 좀 다른가보다 했다. 나중에서야 그 소금강은 정선소금강이고 우리가 온 곳은 오대산소금강이라는걸 알았다. 남편의 어이 없는 표정이라니. 소금강이란게 원래 "금강산의 경관에 견줄 만한 기암절벽을 거느린 골짜기"를 가리키는 거란다. 코지하우스 검색하다가 우연히 근처에 소금강이 있는 것을 알게 되었고, 마침 잘 되었다! 이런 우연이! 내 마음대로 요로코롬 생각한 것이다. 자세히 알아보지도 않고. 띵. 어쨌거나 좋았다. 이 이상 만족스러울 수 없었다.




주차장 - 금강사 - 구룡폭포까지가 대부분의 사람들이 애용하는 코스. 왕복 두시간 쯤 된다. 우리는 구룡폭포, 만물상을 지나 백운대까지 걸어갔다.  더 가면 노인봉으로 넘어가는 코스. 빗방울이 점점 굵어지고 날도 어두워지고 있었기 때문에 서둘러 돌아내려가기로 했다. 처음부터 정상까지 올라갈 계획이 없었기도 했고, 멋진 계곡을 볼 수 있는 코스는 이미 끝난 듯 했다.



그렇게 왕복 세시간 반에 걸쳐 트레킹을 끝내고 주차장 쪽으로 내려오니 오후 네시 반 쯤?  벌써 날이 어두워지고 있었다. 아침 먹고 올라가면서 오뎅 하나씩 먹은게 다인터라 둘 다 몹시 허기가 졌다. 근사한 저녁은 포기하고 주차장 입구에 늘어선 식당들 중 하나를 골라잡아 들어갔다. 곤드레나물밥을 먹어보고 싶었는데 밥을 짓는데만 20분이 넘게 걸린단다.  남편 표정 별로 안 좋다. -_-  포기하고 산채비빔밥 하나 파전 하나를 시켰다. 뜨끈뜨근한 난로 옆에 자리 잡고 얼어붙은 몸이랑 젖은 옷들 녹이면서 정신 없이 먹었다. 좀 짜기는 했지만 맛깔스러운 비빔밥에, 막 끓여낸 보글보글 된장찌개는 어찌나 또 맛있던지. 내 얼굴보다 더 큰 파전도 정말 맛있게 먹었다(고소하기는 했는데 나중에 식으니 좀 느끼했다). 맨 밥 먹고 싶어하던 남편 마음을 어찌 알았는지 아주머니께서 밥 한공기까지 그냥 내어주셨다.
밥 다 먹고 커피까지 챙겨 먹고 차에 올랐다. 날은 이미 저문지 오래. 바로 서울로 출발할까 하다가 차 밀릴 시간을 피해 천천히 올라가기로 했다. 그런데 날이 저물고 나니 갈 곳도, 마땅히 할 일도 없는거다. -_-  마침 남편 지인인 밥아저씨 별장이 요 옆 강릉에 있는게 생각나서 전화를 걸었더니 흔쾌히 주소를 알려주었다. 얼마 전 정년퇴임한 이후로는 줄곧 이곳에 와 계신다고 했다. 차로 20분 정도 달려 가니 깜찍한 '밥그라프아저씨네집' 나무 표지판에 멋진 2층 집이 기다리고 있었다. 깜깜해서 안 보였지만 바로 앞이 경포호라고 했다. 따뜻한 벽난로에 따닥따닥 장작 타들어가는 소리, 한 쪽 벽에는 가야금이 걸려 있고, 또 다른 벽에는 따스한 느낌의 그림들, 유난히 높은 천저에, 집안 곳곳 채워진 멋스러운 고가구들(화장실은 진짜 운동장만 하드라;). 나중에 우리도 나이 들어서 이렇게 별장 짓고 살면 좋겠다 했다. 이미 저녁 먹고 갔다 했는데도 닭도리탕에 자스민차까지 내어주셔서 배 땅땅 두들기며 느즈막히 8시까지 놀다가 나왔다. 
열심히 달려 친정에 도착한 시각이 밤 11시. 꼬맹이가 잠결에 눈을 떠 내 손을 꼭 잡으면서 뭐라고 한참 잔소리한다. 응. 엄마야. 엄마 왔어. 나중에 진서가 조금 더 크면 산에 데려가야지. 그 생각 하면서 꼬르륵 잠이 들었다(보기보다 예민한 우리 꼬맹이, 딴에는 많이 놀랐는지 새벽부터 열이 많이 올라 그러고도 사흘을 꼬박 앓았다).